2025년 08월 31일
여름의 끝자락
8월 31일
올해의 여름 휴가. 8월 마지막 주, 짧게라도 제주에 다녀오자 했다.
수요일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와랄라 공항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비행기 시간에 늦었고 결국 다시 표를 끊었다. 대한항공을 타고 제주에 가는 건 처음이었는데, 비상구 앞 좌석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레그룸이 여타 저가 항공사에 비해 두 배는 되는 것 같았고, 이착륙 시에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말그대로 발뻗고 왔다.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과 함께 비행기에 탔다. 생활복을 입고 왁자지껄 떠드는 애들을 보다가, 잠깐 울컥 세월호를 생각했다. 제주 항공기 사고 이후에 이제는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기체가 흔들리면 옆좌석의 애인 손을 꼭 잡고 공포를 견뎌보려고 눈을 감는다. 커다란 사회적 고통에 때때로 그렇게 우연처럼 접속 되면, 슬픔도, 한편의 안도도 밀려온다. 내 삶이 지속 되는 게 우연이고, 우연을 넘어 행운 같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스스로의 삶을 ‘다행’이라고만 느끼는 건 못되고 비열한 일 같아서 또 금방 슬퍼진다. 그래서 기회 될 때마다 제대로 살자고, 살아 있어서 생기는 책임을 수행하며 살아야 속죄된다고 생각한다.
수와래에서 또 빵을 한아름 사왔다. 털이 북실북실한 회색 푸들 - 와푸가 우릴 보고 짖었다. 알고 보니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서, 주인 언니가 와푸를 안아 올려주자 얌전히 머리를 내밀어 주었다. 머리통과 턱밑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슥슥 만져주니 와푸가 좋아했다. 예쁨을 다 받고는 볼 일을 끝냈다는 양 돌아서 가는 게 웃겼다. 제 할 일이 사랑 받는 것임을 이미 아는 모양이지.
태웃개 앞 바다도 한 번 뛰어들었다. 이제 계단 두 칸 위에서 다이빙할 정도의 용기는 생겼다. 나보다 윗계단에서 물개처럼 연이어 다이빙하는 7살,10살 애기들이 있었다. 나이 먹을 수록 몸은 크고 심장은 작아지는 거라, 나는 작아진 심장으로 용기를 냈다. 풍덩 파란 바다에 뛰어들면 얼마나 많은 물결이 치고 있는지, 그제야 바다가 제대로 보인다. 물위에 둥둥 떠서 누군가 해주었던 말을 생각했다. 마음에 파도가 칠 때면 네가 바다인 것을 기억하라고. 파도는 오고 가는 것이다. 잔파도는 아름답고, 큰파도는 무섭지만 결국에는 부서진다. 파도는 파도일 뿐.
뭍쪽을 등지면, 바다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파랑에 눈이 부셨다.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차가운 역물살이 몸을 감싸고 나를 뭍에서 바다로 데려갔다. 조금 먼 바다로 떠내려간 것도 모르고, 나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 물가에서 멀어진 애를 데려오듯이 유덕이 손을 잡고 데리러 왔다. 발장구를 쳐도 잘 나아가지 못하는 나는 바지선 역할을 하는 유덕을 잡고 뭍쪽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렇게 몇 번 파랑에 풍덩 빠지다가 몸이 추워 꽃게 짬뽕을 먹으러 갔다. 기가 막힌 국물이었다.
제주 오기 전에 단막극 하나를 마무리하고 왔고, 머리 속에 요즘엔 드라마 생각 뿐이므로 계속 그런 이야기를 나눴고 일에 대한 여러 단상들도 나눴다. 둘 다 새로운 일을 다시 도전하고, 두 가지 정도 일을 병행하면서 초보자가 된 기분과 성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 싫은 일과 좋은 일의 비중이 어느 정도 비등한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만 가득 채워놔도 그것의 일부가 싫은 일이 되면서 삶은 결국 균형을 맞춘다.
== 윤태호 작가가 이종범의 스토리캠프에 나와서 한 인터뷰가 좋았다고 더기가 말해주었다. 요지는 그는 창작자로서 크게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긴 시간의 관찰로 얻은 선물이었다. 그는 지금 잘 되면 나중에 한참 정체하는 때가 오겠구나 - 생각하고, 잘 안 되면 또 언젠가 갑자기 성장하는 때가 있겠구나 - 한다고.
== 내가 본 안성재 쉐프 영상 이야기를 보탰다. 성장하는 감각이 멈출 때,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냥 계속 해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부족하구나-’하는 감각으로 그냥 계속 하다보면, 최고의 자리에서 ‘그때 그 감각이 나를 여기에 데려와줬구나’싶다고.
== 산악스키 선수들에게 “나무를 보지 말라”고 코칭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장애물을 너무 의식하게 된다. 좁은 틈처럼 보이더라도 나무 사이로 난 “눈길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길을 집중해서 보면, 좁았던 길도 넓어진다.
드라마 극본이론을 좀 더 보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한 권 여행길에 읽었다. 거기서 작가의 1년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고, 웃겼다. “이제 뭐 쓰지” - “어떡하지” - “다 했다!” - “이제 뭐 쓰지”를 반복하며 얻는 희열과 괴로움이 결국 작가의 삶이라는 것. 그 사이클 안에서 살아가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되는 게 ‘작가 되기’인 것이다.
결국 어떤 종류의 삶, 역할이 인생에서 주어지는 건 하나의 시기이고, 모두 끝나기 마련이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한 격언에서 삶의 방해물만 치우고 나면 진짜 삶을 살아야지- 생각하지만 실제로 지나고 보니 그 고군분투가 모두 ‘진짜 삶’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회사를 만들고 해갈 때도 솔직히 뜻대로 되었다거나 계획대로 만들어갔다는 감각은 희미했고, 고군분투하다가 돌아보니 무슨 일인가 일어났을 뿐이었다. 모두 지나고 빠져 나온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그 과정 안에서도 결국 내가 하는 이 지리멸렬한 고민, 고군분투가 내 목적지이기도 하다는 걸 잊지 않아야겠다.
첫 드라마 대본 합평을 받았다. 교탁 앞에 서서 발표하는데, 이번엔 좀 설렜다. 떨림과 비슷한 느낌으로. 이전에 플롯과 첫 시퀀스 발표 때 같은 반 동료들이 ‘어떻게 안 떨고 즉흥 발표를 하냐’고 물었었다. 호호 하고 말았지만 발표는 일에서 내가 단련된 영역이고 많이 해보았으니 별로 안 떨릴 수밖에… 근데 대본 발표가 좀 떨렸던 건, 미리 첫 시청자가 되어준 지인들의 피드백을 포함해, 내가 이미 ‘고쳐야 할 점’들을 하도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리 어디 맞을지 알고 손바닥 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첫 대본 마감인데, 소감 나누는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민해보았다. 첫번째로 느낀 건, 내가 작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 있구나. 이 장르로 하고 싶은지? = 드라마의 매력, 좋다!의 결론. 드라마 극본 작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다큐 경험에 빗대어보자면 편집기 앞에서 러프컷 2시간 짜리를 10분짜리 최종 버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글로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고 썼다. 그런데 촬영본을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그런 특권이 있는… 그리고 촬영본이 수십시간에 최종본이 70분인…. 다큐와는 또다르게, 짜릿한 재미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에 피드백 받았을 때, ‘주인공다움’과 ‘결말의 방향성’을 선생님이 짚어주셨는데 여전히 그 문제들이 고민이었다. 그런데 한 달 후 달라진 부분은 피드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주인공다움을 고민하면서 나는 인물의 서브 플롯을 살찌우는 식의 선택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중심 플롯에 대한 인물과 인물의 부딪힘을 더 풍성하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피드백은 있었으나, 해석과 풀어나가는 방식을 잘못 결정했던 것. ‘결말의 방향성’도, 해피냐 새드냐로만 생각해서 고집을 부려 봤는데 그 결말이 주인공의 선택을 너무 약하게 만든다는 차원에서 나온 의견이었구나 - 하는 것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차치하고 그 결말 자체가 주인공이 약하기 때문에 와닿지 않는다는 피드백도 있었다. 사건 플롯이 복잡한데, 정작 중요한 선주(주인공)의 내적 변화- 연우 간의 이야기를 그릴 공간이 없어진 게 핵심 문제였다.
수정을 다 하고 다음 극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걸거쳐서 작업을 할까 고민했는데- 걸거치기로 했다. 걸거치되 수정 마감은 정해두는 걸로. 나에겐 몰입하는 재미가 인생에서 굉장히 큰 부분인데, 그런 걸 다시 찾은 감각이라 기분 좋다. 난이도가 높고, 추상적인 과제에 해법이 다양한, 스스로의 고유성을 잘 뽐내볼 수 있는 종류의 작업이라 큰 몰입이 가능한 것 같다. 모든 시간과 사고, 영감이 빨려들어가는 느낌. 결과는 지나가는 길에 남을 것이다.
아, 선생님이 피드백을 하며 조금 울컥해주셔서 그게 고맙고 보람됐다. 잊지 못할 첫 합평.
이세돌의 수읽기 책을 읽고 있는데, 도움 받고 싶은 구절을 만났다. 드라마 극본이라는 게 결국 영상화까지 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피드백 루프가 길고, 반응이라는 보상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 지점이 고민이었는데 이세돌이 말한 부분이 좋았다. 바둑을 두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만 승패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기준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패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패배라면 괜찮다. 어떤 퀄리티의 대국을 뒀는지, 태도와 대국 내용의 충실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계속 지키려고 하는 것 - 그게 프로의 태도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글을 내놓고 보여주는 단계에서 요행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끝.
8월 마지막주 제주로 여름 휴가를 다녀와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