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03일
어쩌다 가을이 오네
9월 3일
어쩌다 가을이 온다. 일 하고 산책 하고 밥 먹고 드라마 수업 다녀오고 그렇게 지낸다. 아침이면 냉침해둔 보리차를 마시고, 눈을 반짝 떠서 좀 뒹굴거리다가 일기를 쓰고, 책도 조금 읽고 릴스도 보고 스트레칭도 한다. 그러다 운동 갔다가 작업실 가고, 집에 온다. 최근엔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와 구르님의 <의심 없는 마음>, <프로젝트 헤일 메리>, <영화 이론>를 읽었거나 읽고 있다. 별다를 것 없이 잘 굴러가는 일상에 안착해있다.
머리카락이 어쩌다 어깨를 넘어설 정도로 길었다. 자를까 고민하다가 C컬펌한 도시 여자들 사진을 보고, 사진첩에 고이 저장해두었다. 원래 역 앞에 새로 생긴 젊은이들 미용실에 갈까도 생각했다. 그런 데 가면 마사지도 해주고 기다릴 때 과자랑 쥬스도 주고 뒷목 마사지에 새콤달콤 껌냄새 나는 에센스도 뿌려준다. 그렇지만 비싸고, 당일엔 왁스로 머리를 만들어줘서 예쁜데 예쁨의 유효기간이 하루 정도다. 기분 좋은 게 중요하니까 그래도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애인이 가본 데 가라고 말렸다. 그래서 작업실 옆 동네 미용실을 가기로 했다.
우리 원장님은 네이버 예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전화로 예약을 해야 했다. 원장님은 단골이 많아서 영업을 안해도 대기 리스트가 차고 넘친다. 저쪽 서교동에 호텔 주방장님은 18살부터 원장님에게 머리를 했다. 30년 단골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그냥 핸드폰 지도앱에서 보고 연락하는 뜨내기 손님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나는 동네 사람이라 오며가며 어쩌다 미용실을 알게 된 케이스였다. 내 전화번호를 한 번 이전에 기록해두었던지 원장님이 ‘그 소담씨죠?’하고 아는 체를 해주었다. 그냥 익명의 동네 사람이고 싶었는데 어쩌다 ‘그 소담씨’가 되어버렸다.
나보다는 원장님이 더 바빠서 원장님 되는 시간에 맞춰 미용실에 찾아갔다. 디지털펌이랑 열펌이랑 비교해서 한참 설명해주셨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그냥 다른 언어 쓰는 사람에게 으레 그러듯이 사진을 자꾸 가리키며 손짓,발짓, 눈빛을 동원해서 내가 원하는 걸 전달해보려 노력했다. 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여튼 미용실의 언어로 말하자면 레이어드컷에 C컬펌을 한 도시여자가 내 추구미였다. 원장님도 동의한 듯 보였으나 결과물은 약간 물에 젖어 털이 곱슬거리는 리트리버와 비슷한 느낌으로 나왔다. (그래도 보다보니 정들어서 그냥 이제는 마음에 든다)
파마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한 시간 반을 기괴한 꼴로 기계에 머리를 매달아두고 나니 뚝딱 끝났다. 원장님과 내내 수다를 떨었는데, 자꾸 말걸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내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싶다. 예전에는 모든 게 피곤했고, 미용실에 가서 하는 스몰토크가 괴로워서 일부러 자는 척 하다가 정말로 잠들기도 했다. 눈 떠보니 그 당시 추구미였던 가인 느낌의 숏컷이 아니라 왠 바가지머리가 거울 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의 변신을 목격하지 못하고, 그 변신을 만든 자를 말리지도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던 거다. 머리 하는 스스로를 보기 민망한 데다가, 사실 안경을 안 쓰면 잘 뵈지도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눈은 감고 있었으나 입은 살아 있었다.
원장님은 하루 세 시간은 운동을 한다고 했다.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서 맨발 걷기를 하러 간다. 이전에 한의원 원장님이 해보라고 처방을 내렸는데, 효과가 꽤 좋다고 한다. 맨발 걷기 동호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큰 산을 올라갔다 온 날에도 보통 사람은 앓아누울 것을, 맨발 걷기로 평소 단련한 사람은 내려와서 김장도 한다고 했다. 하루에 등산도, 김장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미친(positive) 체력인가. 발바닥 곳곳을 꾹꾹 지압해주는 게 그정도로 활기에 좋다는 뜻이다. 원장님은 서대문구는 황토길도 잘 정비해두었는데 마포구는 그런 걸 안 챙겨줘서 불만이 있다. 저녁에는 헬스를 또 한시간 반 정도 하러 간다. 그렇게 하루 종일 운동하고 미용실에서 점심에 먹을 반찬해두고 TV 보다보면 하루가 간다.
여행도 젊을 적엔 자주 갔는데 좋기야 좋지만 이제는 별로 흥미도 없다고 한다. 그냥 이렇게 돌아가는 일상이 워낙 바쁘고 또 그 나름의 재미들이 있어서 멀리 가서 고생하고 새로운 걸 볼 이유를 못 찾겠다는 거다. 이 생활 안에서도 새로운 일들은 매일 일어난다. 사람들 인생에 기막힌 사람들이 언제든 등장하고, 갈등도 화해도 매일 매일 있다. 매일 부지런히 눈 떠서 발바닥을 지압하고 저녁이 되면 쿨쿨 자는 일상. 그녀는 오늘은 이만하면 됐지,하는 만족감이 매일 찰랑이는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지,하는 만족감이 매일 찰랑이는 일상을 살아간다.
끝.
미용실 다녀온 다음날 아침, 아직 냄새가 빠지지 않아 파마약 냄새 속에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