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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09일

잼얘하는 사이

이곳은 우리의 대피처다. 다음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따뜻함에 몸을 녹인다.

요며칠 날이 좀 따뜻한가 싶었는데, 겨울은 겨울이다. 오늘 밤은 체감 온도가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너무 추워서 공기도 얼어버리고, 그 얼음 조각이 떨어지는 것마냥 성긴 눈송이가 공중에 날렸다. 다행히 경복궁 앞에서 집까지 한번에 오는 606 버스가 있었다. 정류장 앞에 추위 대피소가 있어서 두꺼운 비닐벽에 의지해 잠시 추위를 피했다. 이제는 대피가 일상이다. 추워서 대피하고 더워서 대피하고. 날씨만 미친 것도 아니라서 오늘 친구들 회동에서는 미친 시국 이야기가 테이블에 올랐다.

누군가 한편에서 열심히 쌓아올리는 것을 한쪽에선 쉽게 무너뜨린다. 이런 무질서와 혼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리학의 엔트로피 법칙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고, 가만히 있어도 엔트로피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여기서 엔트로피는 세상의 복잡도, 무질서, 손실되는 에너지다. 누군가 에를 써서 바로잡지 않으면 갈수록 무질서하고 혼란해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방청소를 안 하면 점점 엉망이 되는 게 당연하듯이. 우주의 법칙을 빌려서 이해해보는 건데, 그래서 누군가는 무질서와 혼란을 거슬러 보려고 사회적투자를 하고, 정치 스타트업을 하고, 미디어를 하고, 다른 교육에 투자하고, 비영리 영역을 비옥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열심히 쌓아 올리는 사람들이다.

반대편엔 열심히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이가 어는데, 대통령 관저는 얼마나 따실까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매일매일의 삶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조금씩 망쳐 놓는다. 체포를 안 하고 밍기적... 진짜 분열을 만들고 있다. K는 한남동 시위에 갔을 때 지하철역에서부터 열심인 탄핵 반대 시위단을 찍었다며 영상을 보여주었다. 지하철역 통로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지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였다. 호통을 치다가 곧 가족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살갑게 밥 먹었냐 묻는 모습도 보고 놀랐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는 지키고 싶은 게 있어서 정치를 하고, 사랑을 해서 정치를 하지만 방향성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어디서 무엇을 위해 가장 열렬히 싸웠는지의 차이일까? 전쟁에서 북한과 싸운 사람과 군사 독재 정권과 싸운 사람. 이재명이 대통령이 될까봐 그게 싫어서 싸우는 사람과 계엄령을 내린 대통령이 체포 되지 않는 현실과 싸우는 사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다른 시민을 대하는 게 괴롭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 못할 사람일 것이다.

정치적 입장이 우리 존재의 전부도 아니다. 그건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입장의 이유를 이해는 하고 싶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극렬한 감정들이 생기는 걸까... 이재명이 대통령 되는 게 싫어서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재명 좋아 쪽의 에코 쳄버에도 못 끼고 이재명 싫어 쪽이 에코 쳄버에도 못 끼어서 소외된 기분이다. 나는 심지어 항상 자기 자신이 대중적인 편 아닌가 생각하는 마이너였으므로... 오징어 게임 1,2도 안 봤고 선업튀도, 도깨비도 안 본 주제에 한국의 대중을 내가 이해할 수 있나...

오늘은 잼얘를 많이 했다. 언니들은 가벼운 잼얘 말고 할 게 없는 자리에 가서 잼얘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맘 놓고 잼얘를 해도 집에 갈 때 마음이 충만해지는, 우리는 서로 그런 사이다. 맛있는 전과 나물과 산뜻한 정종을 나눠 먹었다. 시국 이야기를 하다가 자꾸 말을 삼키게 되었는데, 목구멍이 썼다. Y님이 잼얘 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동영배- 태양 티켓팅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K가 '여러분'밈 속의 태양도 사랑하냐고 물었더니 그또한 그의 사랑스러운 면모로 이해한다고 답했다. 팬심은 완전한 사랑에 가깝다. 그래. 세상엔 내가 이해 못할 완전한 사랑이 많다. 이거랑 아까 그거는 많이 다르지만...

연말 회고 질문 중에 '할 때마다 좋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더니 H님은 스키를 말했다. '스키' 두 글자를 말하는데 이미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고 눈꼬리는 둥글게 내려왔다. 앞으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김치나 브이가 아니라 '스키'를 외치기로 했다. 환한 미소를 만드는 단어니까. K는 할때마다 좋은 것으로 운동을 꼽았다. 나는 독서모임을 위해 책을 읽는 일을 꼽았다. 그리고 Y님은 '지금 이런 자리'가 할 때마다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Y님을 둘러싼 장면이 내게 인상적이었다. 둥근 식탁 중앙에 놓인 조명에서 삼각뿔모양으로 빛이 떨어졌다. 살이 얼도록 추운 날 잼얘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이곳은 우리의 대피처다. 다음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따뜻함에 몸을 녹인다.

살이 얼도록 추운 날 잼얘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이곳은 우리의 대피처다. 다음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따뜻함에 몸을 녹인다.

끝.


친구들을 만나고 와서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