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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1월 16일

두번째 대본 마감 소감

<두번째 이름을 가진 소녀> 작업 회고

두번째 단막극 대본을 수정고까지 마무리했다. 작업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적어본다.

그만두지 않기. 의심하지 않기.

첫번째 극본을 쓰고 지칠 때까지 수정한 뒤 한달은 완전히 극본에서 손을 떼었다. 처음 드라마 쓰기를 배우면서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첫번째 - 집과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와 두번째- 미등록 체류 청소년의 첫사랑 이야기였다. 그래서 바로 머리 속의 이런 저런 이미지들을 가지고 호기롭게 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계속 머뭇거렸다. 결국 작가원 마감이 나를 멱살 잡고 끌어 주었다.

작가로 계속 쓰는 힘을 가져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어찌 됐건 일을 하면서 극본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 AI로 글과 말, 생각의 가치까지 캠벨 수프가 되어가는 시대에 위기감도 든다.

“이걸 내가 직업으로 하려는 건가? 내가 지금 헛된 시간을 또 쓰나? 시간이 많이 드는 취미일 뿐인가?”

이런 질문들이 둥실둥실 떠올라서 극본 작업을 쉬는 한 달간은 마케팅 강의를 들으며 딴짓을 했다. 회피하고 싶을 때 회사 일에서 일을 더 벌린다거나 바이브코딩하며 시간을 쓰기도 하고 제주도 가서 게으름도 피웠다.

그런데 마케팅 강의 듣고 관련 작업을 할 때는 일을 자꾸 우습게 보게 되었다. 빨리 해치우고 싶고 알량한 영리함으로 충분히 이 정도 과제는 소화 가능하다는 걸 자꾸 뽐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 잘 해내고 싶어서 안달나면서도 겸손해지는 마음이 아니라 겸양 없이 오만한, 한없이 가벼운 마음.

일도 재밌고, 뭔가 만들어내는 과몰입도 당연히 좋지만 그 종류와 난이도가 다르다. 회사 일을 할 때 과몰입 span은 3시간, 많게는 6시간까지 가는데 극본은 1시간만 써도 지쳐서 작업실에서 정형행동을 한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에너지를 쓴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어려워서 재밌고, 힘들 가치가 있는 일이다. 잘 안 될 가능성이 잘 될 가능성보다 확연히 높다. 이 힘듦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지려 하나 키가 작아 슬픈, 까치발의 힘듦이다. 그런 건 나는 인생에서 자주 없는 좋은 일, 멋진 간절함이라고 생각한다.

머뭇거리고 자주 도피했는데, 여튼 책상 위에 붙여둔 작은 메모를 기댈 구석 삼았다. “그만 두지 않기, 의심 하지 않기” 그렇게만 써뒀다. 김고은이 정재형 유튜브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드라마 ‘도깨비’가 공전의 인기를 얻었는데 오히려 그 후에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고. 사람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고, 혼자 고립되어 있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 배우를 계속 할 건데 이러면 안 되겠다. 배우 생활을 하며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아닐 텐데’

배우라는 일이 주는 허무함과 힘듦이 배우 일의 고정값임을 인정한 뒤 길을 찾았다. 때마침 들어온 역할 제안 중에 메인 캐릭터를 받쳐주는 게 있었다. 연기 공부를 같이 했던 박정민이 주연인 영화 ‘변산’이었다. 고민이 끝난 것도 아니고, 힘들고 어려웠지만 일단 여러 지지대를 주변에 세우며 나아가기로 했다. 결국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고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건 고정값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스스로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지, 어떤 내적 대화를 할지가 진지하게 일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두번째 대본 쓰면서 겪은 여러 내적 갈등이 꼭 나쁘진 않았다고 위로해본다. 잘 앓아 넘긴 어린 시절의 수두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두 작품까지 일단 잘 왔다.

지우개를 드는 힘

순수하게 집중한 쓰고 퇴고한 기간을 따지면 3주 정도. 앞에 예열하고 소재 찾던 시기까지 하면 두달 남짓 같다. 근데 중간중간 단편적으로 장면 같은 걸 쌓으면서 버전도 많이 바꿨다. 네 번 정도? 이야기 사이즈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예측이 안 되는 것도 문제 중 하나였다.

첫번째 버전.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 (판타지 섞은 시놉시스)

/ 스터디에서 시놉 피드백 받고 이해 안 간다고 해서 판타지를 뺐다.

두번째 버전.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 (로맨스, 미스터리 2부작)

/ 시작 시점을 어떻게 잡을지 2부작 설계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많이 바꿨다

세번째 버전. 5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 (로맨스, 미스터리 1부작)

/ 2부작 못하겠구나 싶어서 노선 틀었고 이름을 줄임.

/ 이야기 시작 지점 잡느라 고민.

네번째 버전. 두번째 이름을 가진 소녀 (로맨스 미스터리 1부작)

/ 사건 전개 개연성 때문에 수정하고

/ 동현이 순딩이인 버전과 동현이 정반대 성격인 버전으로 바뀌었다.

처음 구상할 때, 사건이나 극의 중심 구조와 관련 없는 너무 많은 배경과 디테일까지 떠올리느라 쓰고 버린 게 많았다.

지우개를 들고 구부정하게 만화를 그리던 영화 룩백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노트북에서 지우개 똥이라도 뽑을 수 있다면 뽑아서 보관하고 싶은 마음. 이런 고통을 재미라고 생각하는, 창작자들은 본질적으로 마조히즘 성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또 동시에 사디스트인… 등장인물을 괴롭히고 죽일까 말까 좋아하는…

최적화 = 바보

일을 할 때 감각에서는 언제나 ‘최적화’를 지향하는데, 창작은 그렇게 가려할 때 참으로 앙상해진다. 금방 가짜 세계인 걸 들통난다. 영화 벌새의 극본을 머리맡에 두고 조금씩 읽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도 그렇고 좋은 픽션은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냥 할 얘기 하기 위해 배치된 장면들이 아니라, 삶으로 느껴지게 담는다.

초반에 고등학교 졸업식 장면을 쓰는 게 있었는데, 잘 못 쓰겠고, 쓰고 나면 앙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지 않나, 이 장면 디테일을 왜 못쓰나 했는데 내 경험 속에 이미지가 부족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해서 졸업식을 안 했기 때문에 그 장소에서의 설렘, 불안과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를 모르겠더라. 모른다는 걸 알아차리고 친구에게 묻고, 브이로그를 보고 했다. 그걸 보고 감을 잡아보려 하니 좀 더 써졌다.

그밖에.

  1. 지시문 쓰는 게 어색해서 다른 대본들을 지시문 중심으로 더 읽어봐야겠다.
  2.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이 부분도 고민해보기.
  3. 구성. 구조를 잡되 시청자의 예상을 비트는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 구조 잡는 것만도 어려웠지만… 거기까지 가야 그나마 ‘잘 쓰는 시청자’가 아닌 작가가 되는 거겠지. 요즘 시청자란 영드,미드,일드를 다 섭렵한 사람들인 것을. 새로운 내러티브가 아니면 외면 당할 것이다.
  4. 애들 도망가는 거 두번이나 썼다. 소외된 아이 / 관찰자나 응원하는 사람 /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는 악당 (주로 아저씨) 라는 본인의 패턴을 메타 인지하고 있다. 저널리즘을 하던 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들이고, 첫 걸음은 그래도 거기서 딛고 싶었으니 후련하다. 이제 거기서 더 멀리 건너가보자.

총평 / 그래도 매번 마감하고 나면 (두 번 뿐이었지만) 뻐렁차다. 막 잘 쓴 것 같고, 다 했다- 싶다. 결국 그 당시 할 수 있는 내 최선이 100이면 90 이상은 애써서 했다. 다른 사람들 대본을 보다보면 스스로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이 보이지만서도… 상대평가 점수보다 일단은 이 ‘최선 안에서의 90 이상’이라는 감각을 잘 반복하는 데 집중하고 싶다.

다음엔? / 매릭적 캐릭터 구축에 중점을 둔 극. 사건에 기대지 않고 감정적 치열함이 끌고가는 극을 써보면 어떨까.

끝.


드라마 작가원 수업을 들으며 두번째 대본 마치고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