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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디자이너의 글쓰기

이야기를 탐험하게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며, 거기에 우리는 속도,방향성,굵기와 배치를 모두 활용할 수 있다. 마치 디자인처럼.

세상엔 다양한 글쓰기가 있다. 시스템적 글쓰기를 하는- 구조를 짜고 쓰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가고 싶은 대로 가보다가 그 후에 패턴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둘의 글은 다르다.

시스템적 글쓰기는 주로 훈련의 산물이다. 내가 하는 글쓰기는 칼럼을 쓰면서 훈련되고 정형화 되었다는 걸 얼마 전 은유글쓰기 수업에서 메타인지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 막 써내려가도 일정한 분량의 문단, 뭐 하나라도 메시지를 쥐어주고자 하는 강박, 독자는 저관여자이고 내가 원하는 깊이로 탐색해줄 리 없다는 불신. 그런 게 내가 2030… 칼럼란에 기고 하며 얻은 습관이었다.

요즘은 템플릿 카피를 검토하고 크리에이티브 공장에서 일하면서 '구조'의 효용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자유라고 느끼는 글쓰기는 후자에 가까운 것이고, 나는 방향 없이 뻗어나가고 달려나가는 자모음이고 싶다. 마침표가 언제 찍힐지, 쉼표를 쓰고, 또, 쓰고, 또, 쓰며 계속 이어나갈지 문단을 바꾸지 않고 계속 가도 될지, 이렇게까지 길게 한 문장이 이어져도 되는 것인지 미심쩍은 눈으로 내 글을 계속 따라오는 그 두 개의 눈동자들을 홀려서 어디론가 데려가 마지막 점을 찍는 자리까지 시선을 내려놓기까지 납치를 하고 싶다.

지금 읽고 있는 네번째 원고라는 책에는 논픽션의 대가라는 어떤 할아방의 집필 노하우가 나온다. 논픽션의 대가이고, 타임지, 뉴요커 등에서 글을 썼다지만 다 영어고 내가 읽어본 적 없는 작가다. 그럼에도 흥미진진한 부분은 픽션과 달리 논픽션이란 대화,경험,풍경,메모 등 수천가지 실마리를 다 뜯어온 다음에 재료를 올려놓고 '자 이제 뭘 조립해볼까'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재료로만, 그걸 변형하지 않고 한 편의 매끄러운 이야기로- 픽션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를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 할아방이 쓰는 가장 큰 원칙은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때로 그림을 쓰고, 분수 같은 수식도 적어두고, 나선형을 그려두고 몇 개 단어를 뿌린다. 그게 그가 쓸 글의 큰 개요다.

나선형 그림 하나를 두고 5천자짜리 글쓰기를 시작한다. 글은 얼핏 보면 직선의 자모음의 나열 같고, 한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같다. 그러나 글을 읽는 우리의 머리 속은 직선의 줄글처럼 언어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가며, 어느 대목에선 아주 빠른 속도로 몰아치고, 어느 때엔 또 바닥에 퍼질러 앉아 멍을 때리기도 한다. 미로처럼 돌고 돌아 사다리꼴을 그리기도 하고, 나선형으로 돌며 이야기의 파형을 넓히기도 한다. 이야기를 탐험하게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며, 거기에 우리는 속도,방향성,굵기와 배치를 모두 활용할 수 있다. 마치 디자인처럼.

디자인학교에서 배우는 은유 글쓰기 수업은 은유를 활용하는 작법을 연습한다. 인간은 은유로 세상을 파악하고 개념화하며, 은유는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수단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오늘의 주제어는 집이었는데, H는 회사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찬 원룸으로 돌아가는 케이라는 사람에 대해 썼다. 글에서 그는 집을 만화경이라 표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들 사이에 들어간 느낌을 말하고 싶었다 했다. 그에 맞춰서 글도 거울처럼 서로 마주보는 쪽에 마주보는 모양으로 조판해두었다. 흥미로웠다.

그런 게 디자이너의 글쓰기일 수 있겠구나 하는 게 흥미로웠다. 나는 메시지를 본능적으로 먼저 찾는 사람인데, 글을 배치하고, 개념과 연결시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그러니까, 어떤 글쓰기는 그냥 만화경을 표현하기로 결정하고 시작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 형태부터 글의 내용, 질감, 무늬까지 모두 만화경을 말하기 위해 쓰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만화경의 어지러움과 환상적인 느낌, 색과 무늬가 섞이면서도 나름의 규칙으로 끊임없이 변주 반복되며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 그 세상은 한 쪽눈을 감고 한 쪽 눈을 어두운 구멍에 대었을 떄 보이는 곳. 그런 개념을 쓰기로 결심한 뒤에 그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흩뿌린다거나, 시점과 말을 조각낸다거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탐험하게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며, 거기에 우리는 속도,방향성,굵기와 배치를 모두 활용할 수 있다. 마치 디자인처럼.

끝.


은유 글쓰기 수업 후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