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image

2025년 01월 16일

묘하게 짜증나는 날에는

호주 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한 날

오늘은 묘하게 아프고 짜증나는 날이다. 행복해도 좋을 만한 이유들조차 비뚤게 볼 수 있을 만한 특별한 날. 호주는 대부분 날이 좋고, 하늘이 파랗다. 해가 미친듯이 뜨겁고 십대 남자애들이 웃통을 벗고 자전거를 탄다. 어깨에 화상을 입은 나는 검은색 바람막이를 둘러입었다. 옷을 뚫고 모범 음식점 컵을 소독하는 그 파란 빛 - UV가 어깨를 찌른다. 나는 소독되는 컵처럼 아프게 몸을 달구면서 호주 골드코스트 거리를 걷는다. 대형마트인 coles까지 걷는 길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신호등의 보행 버튼을 누르면 짜증나게 삑삑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행 신호 소리임을 생각하며 짜증을 억누른다.

오늘도 해가 뜨겁고 화상을 입은 살갗이 벗겨지는 중이라 바다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늘이 있는 숲이나 걸을까 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국립공원을 목적지로 잡았다. 아침에 샌드위치랩을 싸고 래밍턴 국립공원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미 낯선 잠자리에 잠을 설쳤고 그래도 억지로 여행을 준비했는데 처음부터 엉망이었다. 두 시간 정도 달려서 알파카 농장에 들렀다가 국립공원에 내려서야 모든 게 분명해졌다. 알파카는 먹이를 먹다가 내 안경에 침을 뱉었고, 담배를 10년 핀 사람처럼 누런 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애매하게 오그린 손바닥으로 알파카 혀와 입술을 느꼈다. 묘하게 에로틱하고 불쾌한 경험이었으며 다신 flat하게 손바닥을 펴라는 직원 말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빨이 손가락에 닿았을 때는 내 손가락을 당근으로 오해할까 두려웠다.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이게 진짜 길이 맞나 미심쩍었다. 운전도 쉽지 않았다. 우측통행에 운전석이 좌측에 있는 한국과 달리 호주는 우측에 운전석이 있고 좌측 통행이 기본인 나라다. D는 차를 타서 출발하기 전 노래를 하나 만들자고 했다. ‘왼쪽,왼쪽’을 연호하며 우리는 무서운 마음을 애써 떨쳤다. 마주 오는 자동차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나는 한국으로 치면 운전석인 왼쪽에 탔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앉으니, 정말로 운전을 하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더기는 그 사이 운전에 적응했다. 적응은 했다지만 호주의 미시령을 탈 거라고 결심까지 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길은 굽이굽이 돌았고 일방통행인 산길이 많아서 하나의 차선에서 마주오는 지프트럭을 보는 경우들이 종종 생겼다. 호주의 숲속 S자 커브길에서 마주 오는 트럭을 보는 기분이란…. 안 하던 기도를 하게 된다. 국립공원에 도착해서야 시작될 줄 알았던 어드벤처는 고속도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국립공원에 도착하니 적당히 귀여운 앵무새들과 하트 모양 초콜릿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입장해서 원시림에서 수천년 된 듯한 나무들을 구경하고, 공룡이 튀어나올 것 같은 호주 식생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나중엔 긴장이 풀어졌다. 도시락으로 야무지게 준비한샌드위치는 집에 두고 나왔고, 가볍게 산책하고자 한 국립공원은 호주의 원시림이었으며 산길은 한국의 미시령보다 더 구불구불한 일방통행 길이었다. 이 모든 고난을 지나서 집에 돌아와 남겨두고 간 샌드위치 랩을 먹었다. 맛있었다. 아시아나 항공사에 하루 종일 전화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는데 40분을 기다려 고객센터에 연결이 되었다. 집에서 인내심을 갖고 항공사에 전화해서 우리는 일주일 정도 귀국 일정을 앞당겼다. 우리가 이미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에 충분한 일주일이었다.

친구들과 게를 찜쪄먹는 식탁이 그립고, 매일 재미를 느끼며 하는 내 일이 보고싶었으며, 우리가 길들이고 작은 기쁨을 심어둔 집에 가고 싶다. 얼마나 서로가 있어 다행인지,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촘촘히 꾸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여행이었다. 동료가 하루 아침에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피해온 것과 타협한 것, 막연히 선망한 것들을 깨뜨려주는 좋은 여행이었다. 아직 이틀이 남았지만 이미 여행을 끝낼 이유를 찾은 밤이다.

끝.


호주 여행을 끝내며 쓴 글.